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독서메모

이토록 평범한 미래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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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버티고 버티다가 넘어지긴 다 마찬가지야. 근데 넘어진다고 끝은 아니야. 그다음이 있어. 너도 KO를 당해 링 바닥에 누워 있어 보면 알게 될 거야. 그렇게 넘어져 있으면 조금 전이랑 공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져. 세상이 뒤로 쑥 물러나면서 나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실망감이 고스란히 전해지고,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. 바로 그때 바람이 불어와 나한테로" 무슨 바람이냐고 물었더니 "세컨드 윈드'라고 하더라고요. 동양 챔피언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흉내 내서 젠체하는 거였는데, 나중에 그 '두 번째 바람'이라는 말이 두고두고 생각이 나더군요. 그리서 지금까지도 이렇게 기억하고 있지요." 60p

캇땀 호 가야는 인도말로 다 끝났어라는 뜻입니다. 106p

지구의 나이 사십육억 년을 일 년으로 치면 한 달은 약 사억년, 하루는 천삼백만 년, 한 시간은 오십오만 년이 된다. 그런 식으로 따져보면 공룡은 12월 11일에 나타나 16일에 사라졌고, 인류는 12월 31일 저녁 8시에 처음 등장해 열한 시 삼십 분이 되어서야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. 그리고 현대문명은 자정 이초 전에 시작됐다. 그제야 그는 바얀자그에서 본 것의 의미를 알게 됐다. 118p

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찾아와, 그것도 자주, 모든 믿음이 시들해지는 순간이 있어. 인간에 대한 신뢰도 접어두고 싶고,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때가. 그럴 때가 바로 어쩔 수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할 순간이지, 아무리 세찬 모래 폭풍이라고 할지라도 지나간다는 것을 믿는, 버스 안의 고개 숙인 인도 사람들처럼, 그건 그 책을 읽기 전부터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였어.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이기도 하고, 지금도 책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. 그분들은 왜 그렇게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할까? 나는 왜 같은 이야기를 읽고 또 읽을까? 그러다가 문득 알게 된 거야. 그 이유를. "이유가 뭔데?" " 언젠가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되기 때문이지" 121p

내가 다 끝났어라는 뜻의 인도말이 '캇땀 호 가야'라고 말했잖아요. 사실은 그게 아니라 '카타무 호갸'였어요. 125p

그리고 그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갔는지에 대해, 눈 깜빡할 사이에, 마치 폭풍처럼 지나간 인생에 대해. 126p

그렇기에 그 울음은 말하자면 피에로의 재담 같은 아이러니의 울음이었다. 그가 늘 믿어온 대로 인생의 지례가 아이러니의 형식으로만 말해질 수 있다면, 상실이란 잃어버림을 얻는 일이었다. 그렇게 엄마 없는 첫여름을 그는 영영 떠나보냈다. 156p

우리에게는 아직도 지켜볼 꽃잎이 많이 남아 있다. 나는 그 꽃잎 하나하나를 벌써부터 기억하고 있다는 걸 네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 뿐 그리고 무슨 일인지 그 아래에 2014년 4월 16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었지. 181p

"언제나 마음은 유죄지." 영원한 여름이란 환상이었고, 모든 것에는 끝이 있었다. 사랑이 저물기 시작하자, 한창 사랑할 때는 잘 보이지도 않았던 마음이 점점 길어졌다. 길어진 마음은 사랑한다고도 말하고, 미워한다고도 말하고, 알겠다고도 말하고, 모르겠다고도 말하고, 말하고 또 말하고, 말만 하고. 마음은 언제나 늦되기 때문에 유죄다. 196p

모든 것을 직접 체험하면서 이 우주를 인식하기에는 육신의 삶이 너무 짧기 때문에 인간은 말과 글을 통해 서로 협조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해나갈 시간을 단축해야만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백 퍼센트 동의했다. 덕분에 책은 우리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다. 222p

고립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타인을 멸시하기에 비극을 초래한다. 하지만 고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이탈하는 것이다. 이 이탈을 통해 각 존재는 공통의 시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. 231p

과거의 우리는 이토록 또렷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, 왜 미래의 우리를 생각하는 건 불가능한 것일까? 그럼에도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, 그리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. 그게 할아버지의 최종적인 깨달음이었다. 240p

미래를 기억한다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묻지 않고 자신이 누구일 수 있는지 물으며 스스로를 변형시킨다는 말이기도 하다. 255p

시간은 흐르지 않는다. 흐르는 건 기억이다.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억이 흐르는 길을 만들어 내는 것뿐이지만 기억의 흐름을 만듦으로써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살 수 있다. 그 긴 시간 속에서, 짧은 시간 속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목도하는 우리는 세상을 낙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. 257p

삶이 완전히 패배했다는 것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. 이제 다른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. 263p

타인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만 우리 인생은 살아볼 만한 값어치를 가진다는 것, 이유를 알아내기 위한 시도는 헛될 수 있지만 이해하려고 애쓰는 마음에는 패배한 이후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이다. 266p

미래가 없어 동반자살한 어느 연인처럼, 십 년 동안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한 사람을 기억한 후쿠다 준처럼, 죽을 마음으로 뛰어내린 바다에서 살기 위한 마음을 만난 난주처럼, 타인과 연결되는 정신의 삶 속에서 겹겹의 시간을 살며 차가운 마음에 온기를 만들어나간 할아버지처럼,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아내의 존재를 느끼는 한 사람처럼, 요컨대 삼에 패배한 적 있는 그들처럼 진주에게도 세 번째 삶이 시작되었으면 좋겠다. 희생적인 아버지와 함께했던 유년의 삶, 치매와 함께 시작된 혼돈과 혼돈의 한가운데서 지켜보았던 아버지의 과거, 그 모든 기억들을 품고 시작되는 세 번째 삶, 이 순간 나는 진정한 마음으로 진주에게 불어오는 새 바람을 기다린다. 정신의 삶에서 세 명의 바르바라가 겹쳐진 시간을 함께 살았던 것처럼 진주의 삶과 나의 삶도 중첩될 수 있다고 믿는다. 깊은 시간의 눈으로 미래를 기억할 수 있다면 진주의 슬픔도 나의 슬픔도 새 바람 속에서 조금씩 괜찮아질 것이다. 바람이, 새 바람이 분다. 267p

어두운 시간이 빛으로 가득 찬 이 몸을 만든다. 지금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도 이런 것이다.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언젠가 우리의 삶이 될 것이다. 273p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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